History : 역사

원주민들, 시간을 초월한 대륙에서 꿈꾸다

애보리진(Australian Aborigine)의 탄생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고대의 역사를 지닌 곳 중의 하나 입니다.

이 고립된 대륙의 첫번째 거주민이었던 원주민인 어보리진(Australian Aborigine)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로부터 배를 타고 호주로 도착하였습니다.

인구이동

그 후 2~4만 년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됩니다. 처음 유럽인들이 호주를 발견했을 때 약 100만 명의 원주민들이 300여 개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쓰며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부족들은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종교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구전으로 자손들에게 전달을 하였고 자손은 또 새로운 세대에게 그들의 모든 것을 전달하였습니다.

유일하게 그들이 자손들에게 교육과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던 록아트 (Rock Art)나 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들이 그들이 남긴 전부입니다.

애보리진의 종교적 전통은 각 부족의 기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애보리진들의 믿음의 중심은 땅을 비롯하여 나무와 새, 사람을 창조한 ‘창조적인 존재’에 있습니다.

이 존재들은 Dreamtime(만물의 대창조 기간) 시기에 대륙간을, 형상없는 지구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들이 처음 출현하고 방문했던 장소들은 강, 암석, 언덕, 산이 되어 자연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이 존재들은 사람, 식물, 동물 그리고 그 삶 속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 모든 일을 끝마친 후 그들은 바다, 지하 또는 천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적인 능력은 여전히 땅에 깃들어 있어 비록 보이진 않지만 그들의 창조물을 결코 버리지 않고 그들의 삶에 간섭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발견

영국 죄수를 보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대사는 16세기에 유러피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그 막을 열게 됩니다.

수천 년의 고립된 시간이 지난 후에 원주민들은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게 되고 그 이후 네덜란드의 탐험가 들이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이 대륙을 영국령으로 선포하기 훨씬 이전 1606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퀴로스’가 이미 이 대륙에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통과하여 자바섬 쪽으로 향하던 배들이 거센 파도와 바람에 밀려 미처 북쪽으로 방향을 틀지 못하고 이 대륙에 도착하는 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또한 네델란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지에서 탐험가들이 이 대륙을 조사하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호주의 북서부 해안은 황량하기 짝이 없고 사막의 모래 바람만 이는 불모지로 보였습니다. 아무도 이 땅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영국입니다. 1770년에 제임스 쿡 선장은 동부 해안을 따라 항해 하던 중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정착하게 됩니다.

호주의 동남부 해안을 탐험하면서 비로소 이 대륙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된  영국은 잃어버린 미국의 13개 식민지를 대신하여  교역을 위한 새로운 기회와 미국으로 보내던 죄수들을 수용할 새로운 유배지로 호주가 적임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제임스 쿡 선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하기로 결정한 영국은  1787년 11척의 배, 750명의 죄수, 군인 그리고 2년 동안 소비될 물품 등을 실은 첫번 째 함대를 보타니베이(Botany Bay)에 보내게 됩니다.

이때 도착한 약 1500명의 사람들 중 절반이 죄수였고 나머지는 이들을 관리, 감독할 관료와 이들과 관계된 일반인들이었습니다. 이 함대의 책임자 필립 총독은 함대가 입항한 항구를 영국의 귀족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서 시드니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가 최초로 시드니에 상륙한 날인 1월 26일은 호주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그 후 1888년까지 100년 동안 영국의 흉악범 죄수들이 16만명이나 계속 강제이주를 당해 호주에 왔습니다.

이들은 초기 호주 식민지 개발의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총 16만명의 죄수들 중 여자 죄수는 24,700여명에 불과하여 이민 초기에 호주의 남녀 성비의 심한 불균형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유형 죄수 유입에서 뉴사우스웨일즈주가 111,500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타 죄수들은 빅토리아 주와 퀸즈랜드 주 그리고 뒤늦게 개발이 시작된 서부 호주로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자유 정착민들이 개척을 시작한 남부 호주에는 유형 죄수가 동원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남부 호주에서는 유형 죄수의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은 자유 정착민들의 개척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이 호주를 식민지로 삼은 최초의 이민역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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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점유자들 대륙을 차지하다

원주민 말살 정책

영국은 원주민이 살고 있는 땅을 자국의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미지의 땅이라고 지도를 작성하여 영국에게 유리한 지명을 새로 붙이고 원주민들을 대량 살해하는 “원주민 말살정책”을 몇 백년 동안 일상적으로 계속 감행하였습니다.

또한 호주를 자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하여 Captin Cook의 고향인 웨일즈 지방의 이름을 따서 호주의 동쪽을 “뉴사우스 웨일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호주의 동쪽이 영국 본토의 사우스 웨일즈처럼 초록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라는 것과 호주대륙을 처음 발견한 Captin Cook의 고향 Wales 지방을 유추해서 “뉴”자를 첨부해서 부른 지명입니다.

또 영국은 호주의 서쪽을 영국식 이름으로 “뉴홀런드”라고 불렀습니다. 전부 이런 식으로 그 넓은 호주 땅의 각 지역에 영국식 이름으로 “뉴”자를 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나중에는 각 지역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아예 호주 전체를 영국의 영토로 여기는 새로운 국명으로 1850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라고 불렀습니다.

이 국가 이름은 라틴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뜻은 미지의 남쪽의 대륙이란 의미입니다.

골드러쉬

호주 황금의 시대

1840년대까지 호주 대륙은 대영제국의 남태평양 전진기지로 전세계적인 이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850년대 금광이 발견되면서 이른 바 골드 러쉬로 인한 이민 붐이 붑니다. 호주 대륙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기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인구는 급격한 팽창을 하게 되어 1877년에는 200백만을 돌파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840년대 40만에 머물던 호주의 백인 인구가 불과 40년 사이에 5배가 증가한 200백만이 되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골드 러쉬는 호주 이민사에 가장 중요한 인구 팽창의 계기가 됩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

Australia

1901년 1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는 뉴질랜드를 제외한 6개의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독립하였습니다.

이전까지 호주는 6개의 식민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 구역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면서 6개의 구역은 호주의 각 주가 됩니다.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각 식민지는 각 주로 재출발함으로써, 이 땅에 영연방(英聯邦)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호주는 근대 국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은 하였지만 호주는 여전히 영국과는 돈독한 관계는 지속 되었습니다.

이민정책뿐만 아니라,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나자 호주는 재고의 여지 없이 영국의 동맹군으로 참전을 하여 많은 전과를 올립니다.

 

백호주의

유색인종의 이민을 반대하다

1850년대의 골드 러쉬를 통해 중국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금광을 비롯한 식민지 개발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멀리 떨어진 유럽보다는 쉽게 싼 임금으로 구할 수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채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호주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이민을 온 사람 보다는 돈을 벌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여타의 이민 집단과는 많이 다른 거주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들은 멜번이나 시드니 등의 대도시와 벤디고와 발라라트 등의 금광 신도시에 폐쇄적인 집단 거주를 이루며 초기 차이나타운을 건설해 백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차이나 타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청국에서 행정 관리를 파견하는 일도 있었으며 중국계 노동자들은 금광에서 발견한 금을 호주 시장에 내 놓지 않고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이질적인 행태로 인해 백인들과 갈등이 생기면서 중국인 유입에 반대하는 백호 주의의 뿌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백인 노동자들은 싼 임금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중국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들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노동당을 창당하면서 정치 세력화하자 이들의 주도로 중국인과 같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반대하는 백호주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1901년 호주의 6개 식민지들이 연방을 구성했을 때의 헌법을 보면 새 나라의 국시를 백인 국가, 유색인 배척, 앵글로색슨족 우선, 영국의 군주를 계속 국가 수반으로 하여 영국에 절대 충성할 것을 골자로 하였으며, 신생 연방 정부가 국가로서 취한 첫 조처는 백인 이민만을 받아들이고 세계의 대다수 민족에 대해 문호를 닫은 백호주의 정책의 선포였습니다.

호주는 이 후 20세기의 상당한 기간을 거만한 식민지적 시대 착오에 빠진 채 세계의 밑바닥 양지 바른 곳에 격리되어 번영하여 왔습니다. 이 법률은 1973년 철폐되었으며 철폐 될때까지 전세계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민족 국가

다양한 민족의 유입

1921년 미국에서 이민자들의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이 실시되면서 다른 유럽 지역의 이민자들이 대거 호주로 들어오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전쟁의 피해를 입은 유럽에서 또 한 차례 이민자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것은 2차 대전 때 일본의 침공을 받은 호주가 인구를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것과 맞물려 호주의 인구는 다시 한 번 급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5년부터 약 5백 5십만명이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됩니다.  이런 전후의 대규모 이민을 계기로 호주의 2차 산업이 발전을 하게 되었고 전반적인 경제 성장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1973년 백호주의가 공식적으로 철폐되면서 다양한 인종들이 이민을 오게 됩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베트남의 공산화로 야기된 대규모의 난민의 유입이 있었고, 그 이후 1980년대, 호주 정부가 다문화 주의가 선택하면서 더욱 개방된 이민의 문호로 말미암아 더욱 다양한 나라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져, 호주는 점점 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다민족 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현재 호주 인구 중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는 전체 인구의 2/5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민 문화는 호주를 현대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